T / 12. 정희진의 어떤 메모 8

사회적 특수계급 16.11.25 <대한민국 헌법> 법제처, 대한민국 국회제공, 1987*나에게 ‘올해의 인물’은 지난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승강장 문을 고치다 숨진 김모군(19)이다. 김군 생각해보니 이름도 모르겠어. 그가 산 인생은 19년. 그는 고3 때부터 취업을 걱정했고, 어머니는 ‘책임감 있는 아이로 키운 것을 후회한다’고 울부짖었던 사회적 특수계급은 가족과 이성애 제도처럼 자연스러워 보이는 문화를 총동원한 일종의 욕망공동체다. 민주노총을 주도하는 한 대기업 노조가 사측에 제안한 교섭안에 ‘자녀 조합원 승계(입사)’ 조항을 넣었다가 거절당한 바 있다. 곳곳에서 세습이 이루어지고 있다. 연예인, 진보파도 자신의 명성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을 당연시한다. 누군가는 누구의 딸/아들이다. 예능 프로그램은 연예인 아이들이 점령한 지 오래다. 유사한 금수저 계급(대기업 정규직 노조원 연예인 유명 운동가)의 부모도 없는 젊은이에게는 기회의 평등조차 주어지지 않는다.세계 자본시장에서 무역규모 10위권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은 새로운 봉건사회를 건설 중이다. 보수 진보 페미니스트 할 것 없이 참여에 주저하지 않는다. 가족과 이성애 제도는 정치 밖에 있다. 누구나 100m 달리기에 출전할 수 있지만 출발선 사정은 다르다. 아이를 업은 사람, 운동화가 없는 사람, 관중의 눈총을 받은 사람. 출발선에 서기를 포기한 그들까지. 반면 사회적 특수계급인 ‘벌금수저’들은 간편한 복장으로 몸을 풀고 있다.오직 어머니 16.11.11 <나는 가해자의 어머니입니다>, 스크리볼드 지음, 2016* ‘내 인생의 책’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저자’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글쓰기에는 어느 정도의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쓸 자격, 자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평소에 그 부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인간 작문이 가능한 극한의 상황은 어디까지일까. 딜런의 어머니와 같은 상황에서도 글을 쓸 수 있다면 인간은 재정의돼야 한다.나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망각 외에 글을 쓰는 방법(대면)으로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나(가해자 어머니) 사과만은 거절하는 세상에서 그녀도 자살을 생각했지만 죄책감에 죽을 수는 없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죄의식은 물론 보다 본질적인 자녀에 대한 이해, 호기심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내가 아이의 뭘 놓쳤는지, 아이가 나에게 고통을 말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왜, 도대체 왜 딜런은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이해. 좋은 말이다. 하지만 타인을 이해하려는 순간 트라우마가 시작된다. 더구나 악은 원래 이해 불가능한 인간사다. 이해는 밑에 서야 보인다(under/stand). 너무 밑에서. 그러나 악의 일부인 인간은 악 위에서 잘난 척하며 그것을 물리치려 한다. 당연히 숭고한 실패(박창욱 감독)다.멈추다16.10.28<도덕경(老子)>노태준 옮김 해설, 1984*여성주의나 문화연구에서 언어도단은 피억압자의 언어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남성, 서구 중심의 언설체계에서 탈식민의 첫 단계는 자신의 언어를 갖는 것이다. 길이 없는 곳부터 시작해야 한다. 언어도단이 명확하게 시각화된 장면은 발 디딜 틈이 없는 상황, 땅에서 절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미묘하고 다양한 의미가 영어로는 그저 ‘말할 수 없다'(unspeakable)니까 여기서 또 다른 언어의 도단이 일어난다.언어가 존재를 완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은 언어의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의 한계가 아니라 조건이다. 언어의 불완전성은 다른 언어로의 가능성(지식의 발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천만에, 말도 안 돼, 어이가 없어, 할 말은 태산 같은데 한마디도 못한다. 그래서 내 마음만 무너진다! 이 시대에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은 저뿐만 아니라. 고립감과 절망을 달래려고 <노자>를 취했다. 참된 길에는 이름이 없다. (참된 길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말들이 말하지 말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내가 만들어서 나 혼자 쓴다) ‘시대적 인격’이라는 표현이 있고 특정 시대에 많은 캐릭터를 말한다. 지금 이곳은 각자의 도생, 누가 더 뻔뻔한가를 겨루는 곳이다. 공식적 비공식적 약탈능력과 무지가 권력인 사람이 성공하는 세상이다. 주변이나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에 이런 사람들이 난무하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사회가 그들 편이기 때문이다. 문제 제기하는 사람에게 그만두라고 말한다. 천지가 그런 사람이니 ‘너만 다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누구나 다치고 공동체는 붕괴한다. 누가 말려야 하는가.죽은 이의 망막에 맺어진 나의 시간 16.10.21 <전장의 기억> 토야마 이치로 지음, 2002*언제부턴가 ‘인생 한순간’, ‘한 번에 훌쩍 지나간다’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내 해석은 일상적으로 폭력을 당할 것 같은 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사회의 도래다. 이것이 헬 대한민국의 의미다. 나의 목표는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내가 나를 붙잡아두지 않으면 사고가 날지도 몰라. 확실히 사고도 생각하기 나름. 사고는 이미 여러 번 냈고 나는 그때마다 무너졌다. 이후 내 마음을 걸어둘 주문을 간절하게 찾아다녔다.”거의 모든 사람이 시체 곁에 있다. 우리는 시체와 일체화될 수도, 거룩한 망령으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다. 총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늘어선 줄에 선 자가 있고, 다음은 내 차례다. 죽은 이의 마지막 시간, 그의 눈 망막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내 모습이 포착돼 있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1213쪽) 인생이란 죽은 사람의 망막에 맺어진 내 시간이다. 그래서 인생이 짧은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짧지만 최선의 저항(복수)을 모색한다. 나는 ‘총’이 없기 때문에 복수는 결국 맹렬히 일상을 사는 것, 책상 앞에 앉는다. 다른 방법으로 인간 쓰레기를 살해하기 위해서다.하루가 지옥인 이들에게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만큼 위안은 없다. 내가 자연의 법칙을 사랑하는 이유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지만 끝에도 순간이 있고 그 순간은 꽤 길다. 끝(죽음)은 두렵지도 슬픈 일이 아니다. 분노를 억누르면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두렵지 않다. 악취를 품을 때, 더러운 인간이 승승장구하는 세상에 절대 기죽지 않을 때, 나도 더럽다는 것을 인정할 때 승부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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